'왓츠 인 마이 백'은 원래 가진 것을 꺼내 보여주는 콘텐츠 형식이다. 유튜브나 잡지에서 누군가 가방을 엎어 테이블 위에 늘어놓으면 카메라가 물건마다 이름과 가격을 붙인다. 취향의 목록이자 구매의 목록. 무엇을 가졌는지가 누구인지를 대신 설명해주는 형식이다.
나는 벗는 일을 한다. 내 가방에서 나오는 물건은 전부 벗기 위한 준비물이거나, 벗기 전까지만 걸치는 임시 의상이다. 목록의 끝에서 이것들은 전부 몸에서 떨어져 나가야 한다. 그래도 가격은 붙는다. 하나도 빠짐없이 붙는다. 아무도 대주지 않기 때문이다.
0. 가방
롱샴 르플리아주 라지. 모든 것이 들어간다. 가방에 요구하는 조건은 네 가지뿐이다. 가벼울 것. 짐이 무거운 일이니 가방까지 무거우면 곤란하다. 튼튼할 것. 특히 손잡이가. 어깨에 걸칠 수 있을 것. 닫힐 것. 지퍼가 없는 가방은 쓰지 않는다. 가벼울 것, 튼튼할 것, 걸칠 수 있을 것, 닫힐 것. 적어놓고 보면 이건 가방의 조건이라기보다 이동하는 사람의 조건이다.
1. 블루투스 스피커
JBL FLIP 4. 15만 원 정도에 샀고 두 개째 쓰고 있다. 가벼운 무게에 비해 저음이 강한 편이다. 모델의 필수품은 가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 1번 준비물은 스피커다. 가운을 놓고 온 날은 그냥 모델대에서 주섬주섬 옷을 벗어도 된다. 다행히 아직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이 없는 모델 수업은 시뮬레이션조차 어렵다. 강의실에 스피커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교탁 옆에 있고, 나는 모델대 위에 있다. 벗은 채로 모델대에서 내려와 볼륨과 선곡을 만지고 다시 올라갈 수는 없다.
포즈를 푸는(모델에서 모델 아닌 사람이 되는) 데는 이유가 필요하고, 볼륨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스피커는 손이 닿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챙길 것이 늘어난다. 전날밤 충전을 완료하고, 만약을 대비해 보조배터리도 챙기고, 페어링 상태도 미리 확인한다. 볼륨은 첫 곡에서 정해두고 수업 내내 건드리지 않는 편이 낫다.
첫 번째 스피커는 7년을 썼다. 배터리가 닳으면서 재생 시간이 조금씩 줄었고, 어느 날부터는 수업 중에도 전원을 연결해두지 않으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무선으로 쓰려고 산 물건인데 선을 꽂아야 안심이 되는 상태. 음악이 중간에 끊길 수 있다는 가정이 하나 들어오면 세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그래서 같은 모델로 새로 샀다. 다른 제품을 알아보지도 않았다. 7년 동안 문제가 된 것은 스피커가 아니라 배터리였으니까.
조소과와 회화과처럼 세 시간 동안 고정 포즈를 하는 수업에서 음악은 나를 위한 것이다. 졸지 않기 위해, 음악에 따라 시간을 가늠하기 위해, 실제로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 크로키 수업에서 음악은 퍼포먼스를 위한 것이다. 3분, 5분, 10분으로 끊기는 타임 구성을 미리 알고 가면 플레이리스트가 곧 진행표가 된다. 과거에는 mp3 플레이어를 썼고, 요즘은 멜론이나 유튜브뮤직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의 유료 결제가 필수다. 이건 모델 일의 고정 비용이다. 월 2만 원.
2. 가운
발목까지 오는, 부드러운 소재의 랩 원피스. 허리끈 하나로 여밈을 고정하는 스타일이다. 단추가 많으면 입고 벗을 때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휘리릭 입고 벗을 수 있는 것으로 골랐다. 일상복으로도 입을 수 있는 옷이지만 나는 모델용으로만 쓴다. 얇은 소재의 여름용과 기모가 있는 겨울용이 있다. 한 벌에 5만 원쯤 한다.
수업 사이 쉬는 시간에는 가운만 입고 화장실에 가거나 담배를 피우러 나가기도 한다. 그래서 너무 짧거나 야하지 않은 옷으로 골랐다. 강의실 안에서는 벗은 몸이 업무의 조건이지만,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부터는 아니다. 가운은 그 경계에서 입는 옷이다. 가운은 그 자체로 소품이다. 누드모델에게 가운은 벗기 전에 임시로 걸치는 옷이다.
어린 시절 나는 <마법기사 레이어스>라는 마법소녀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세일러문, 웨딩피치, 스위트 민트, 빨간망토 차차, 천사소녀 네티, 카드캡터 체리까지 마법소녀 소재의 작품은 다 좋아했는데,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바로 '변신'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에피소드별 주요 내용과 줄거리보다도 매번 그 변신 장면을 정신을 놓고 보았던 것 같다. 입고 있던 옷을 완전히 벗어내고 알몸에서 천사로, 전사로, 요정으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 내게 그 빛나는 과정은 바로 탈의실에서 일어난다.
대부분의 변신에서 알몸은 빛으로 처리된다. 다 벗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윤곽만 남고 나머지는 광원이 삼킨다. 벗음이 연출되면서 동시에 지워지는 방식이다. 탈의실에는 그런 빛이 없다. 내 변신은 낮은 조명과 침묵 속에 이루어진다. 또한 변신물에서 알몸은 통과하는 지점이다. 벗은 다음에 더 강한 옷이 입혀지고, 그 옷을 입은 상태가 완성된 상태다.
내 일에서는 순서가 반대다. 벗기 위해 가운을 입는다. 변신 후 내가 입는 것은 '누드'라는 복장(케네스 클라크 <누드의 미술사>)이고, 이게 내 전투복이다.
3. 슬리퍼
실외에서 신고 다녔던 운동화를 맨발로 신고 무대 앞에서 벗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고 왠지 발냄새가 날 것만 같다. 더럽지 않고 소리가 나지 않는 실내용 천 슬리퍼를 챙겨 다닌다. 사지는 않는다. 호텔이나 기내에서 주는 것을 쓴다. 이 목록에서 유일하게 값을 치르지 않은 물건인데, 그것도 결국 어딘가로 이동한 값이다.
탈의실에서 모델대 사이에서만 신는 신발이다. 그 거리는 길어야 열 걸음쯤 되는데, 그 열 걸음이 조용해야 한다. 가운을 여미고 걸어 나가는 동안 소리가 나면 사람들이 고개를 든다. 소리 없이 도착해서 소리 없이 벗는 것이 시작이다. 가운과 마찬가지로 일시적 의상이지만, 그 자체로 소품이다.
바닥의 상태도 모델에게는 신경이 쓰인다. 겨울 강의실 바닥은 차고, 모델대는 대체로 나무이거나 천이 깔려 있다. 세 시간 동안 서 있는 포즈를 할 때 발은 몸 전체를 받치는 일을 한다. 그날의 노동을 제일 먼저 감지하는 것도, 제일 오래 기억하는 것도 발이다. 슬리퍼는 그 발이 일하기 직전까지 신는 신발이다.
4. 타이머 : 아이패드
크로키 수업에서는 시간을 재야 한다. 3분, 5분, 10분. 재는 사람은 나다. 예전에는 스톱워치를 썼다. 문제는 눈이었다. 포즈 중에는 고개를 돌릴 수 없고 시선도 정해져 있다. 모델대 아래 놓인 스톱워치의 작은 숫자는 그 시선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남은 시간을 확인하겠다고 눈을 굴리면 그것도 포즈가 흔들리는 일이 된다. 스톱워치가 울리면 그때마다 다시 스타트를 누르는 것도 몰입을 깼다. 그래서 지금은 인터벌(모델 시간 3~10분과 포즈를 바꾸는 3초 등) 설정이 가능한 아이패드를 따로 들고 다닌다. 중고로 25만 원에 샀다.
중요한 것은 음악과 시간을 분리하는 일이다. 한 대의 기계에 둘 다 맡기면 타이머를 제어하다 실수로 음악이 끊기거나 음악을 지다가 타이머가 멈출 수도 있다. 그래서 소리를 내보내는 기계와 시간을 재는 기계가 따로 있어야 한다. 벗은 사람 하나가 모델대 위에서 세 대의 기계를 관리한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 사실을 모른다.
5. 휴대폰
휴대폰도 있다. 이동 시간과 대기 시간의 물건이고, 스피커에 음악을 보내는 물건이기도 하다. 누드 수업에서는 당연히 카메라 사용이 금지되기 때문에, 휴대폰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사실이 재미있을 때도 있다.
그리는 사람들은 가방에 넣거나 엎어둔다. 나만 손에 들고 있다. 쉬는 시간에 가운을 여미고 앉아 메시지를 확인하는 동안, 방 안에서 촬영이 가능한 기계는 그것 하나다. 보여지기 위해 그 자리에 선 사람이 그 방에서 유일하게 찍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배치다.
규칙이 어느 쪽을 향해 있는지가 여기서 그대로 드러난다. 금지된 것은 나를 찍는 일이지 내가 찍는 일이 아니다. 이 방에서 이미지가 되는 쪽은 정해져 있고, 그래서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도구는 반대쪽에서만 회수된다.
나는 회수 대상이 아니다. 규칙이 지키려는 것이 모델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모델은 찍는(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으로는 상상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나는 찍지 않는다. 강의실 사진 한 장이 어떤 경로로 무엇이 되는지를 이 일을 하면서 배웠다.
6. 담요
작은 담요도 하나 들고 다닌다. 모델대가 늘 깨끗한 것은 아니고, 포즈에 따라서는 의자나 바닥에 직접 앉아야 한다. 옷을 입은 사람이라면 그냥 앉으면 되는 자리다. 나는 그럴 수 없으니 담요를 편다. 벗은 몸이 무엇에 닿을지를 정하는 일도 준비물의 몫이다. 이러저런 로고나 무늬가 있는 것을 사용할 수는 없어서, 1만 원 정도에 깔끔한 검은색으로 구매했다.
7. 가방 밖의 것
수업 전 목욕과 제모는 필수다. 이동 중에 땀이 났다면 알코올 티슈 등으로 겨드랑이와 무릎 뒤를 닦는다. 학생이나 화가 선생님들의 집중에 방해가 될 수 있는 향수나 향이 강한 제품은 따로 바르지 않는다. 매니큐어나 색조 화장도 하지 않는다. 나는 화보 모델이 아니기 때문에.
수업 가는 날 입는 옷에도 규칙이 있다. 몸에 자국이 잘 남는 조이는 속옷이나 양말은 피한다. 유두가 겉옷으로 드러나지 않는 계절에는 아예 브래지어를 입지 않기도 한다. 세 시간 동안 사라지지 않고 보여지는 자국이라는 점에서, 가방 안이 아니라 이미 몸에 입는 준비물이다.
그리고 전날엔 술이나 과한 운동을 하지 않는다. 어쨌든 누드모델은 육체노동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알겠다. 모델의 필수품은 몸이다.
8. 합계
스트리밍 구독료는 매달 나가고, 스피커는 몇 년에 한 번 새로 산다. 몸에 자국이 날까 봐 붙일 수가 없어서 늘 사용하는 뿌리는 파스의 비용까지. 어느 학교도 이걸 대주지 않는다. 장비를 개인이 마련하고, 소모품을 개인이 갈고, 유지비를 개인이 낸다. 셀럽의 가방에 붙는 가격표가 브랜딩이라면, 여기 붙는 가격표는 명세서다.
이 목록에서 몸만 살 수 없다. 고장 나도 같은 모델로 새로 주문할 수 없고, 계절마다 두 벌씩 갖출 수도 없다. 번호를 붙일 수 없는 유일한 항목이다. 그래서 이 일에는 왓츠 인 마이 백보다 루틴이 중요하다. 가방을 두고 온 날에는 어떻게든 되지만, 몸은 집에 두고 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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